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②

Jun 20, 2021
주일대예배
안인권목사
구절: 
마7:7-12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7:7-12)

찾는 이유 – 찾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필요하기 때문이며,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평생 필요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인생이다. 문제는 해결의 끝이 없다는 데에 있다. 수가 성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이 목마르지 않는 물을 예수님께 요청한 것 같이 인간 노력에 의한 문제 해결은 일시적이며 임시 방편이라는 것이다. 근본적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잃어 버린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 -- 인류 최초의 찾는 사건이 창3:9절에 나온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조주이시며 전능 자이신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시는 것이다. 아담이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낯을 피한 이유는 선악과 사건 때문이다. 불순종한 인생은 결국 하나님의 곁을 떠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찾아 하나님의 보좌를 떠나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을 상실한 결과 –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요 그 결과가 사망이다. 죄와 사망이 하나님과의 분리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 상실은 인생 전체의 상실이다. 현세와 내세 영원한 상실이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상태 - 하나님을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 두신 결과(롬1:28)는 ‘모든 불의,추악.탐욕,악의,시기,살인,분쟁,사기,악독,수군수군,비방,능욕,교만,자랑,악을 도모,부모거역우매,배약,무정,무자비,사형 해당자로서 결과적으로 지옥의 삶을 살게 된다. 

두 종류의 탕자 – 눅15장에 잃어버린 아들, 잃어버린 은전,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나온다. 찾는 입장이 있고 잃어버려진 입장이 있다. 탕자의 비유에서 집안에 있는 아들과 집 떠난 아들이 있다. 집 떠난 아들은 아버지보다 재물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동안 결국 재산이 고갈되고 집도 양식도 건강도 잃고 생명까지 잃는 위기에 처한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결국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상실한 후에야 비로서 아버지(하나님)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 인생의 모습이다. 

두 종류의 탕자 -- 탕자는 집 떠난 아들은 물론 집 안에 있는 아들도 마찬가지다. 큰 아들은 마음이 떠난 탕자이며 작은 아들은 몸이 떠난 탕자이다. 마음이 떠난 탕자는 교회 안에 있지만 마음이 다른 곳에 가있는 성도이다. 하나님 보다 더 중요시하는 다른 것에 마음을 뺏긴 성도는 예배 실패, 기도 실패, 순종 실패, 감사 실패의 삶을 산다. 교회 생활의 성공은 예배 성공, 기도 성공, 순종 성공을 말하며 이것은 하나님 관계의 성공을 말한다. 

멸망에 직면한 인생의 유일한 해결책 – 모든 것을 상실한 탕자의 살 길은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이다. 돼지의 먹이로도 굶주림을 해결할 수 없었다. 주는 자가 없었다. 이 세상에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오직 하나님뿐이다. 아버지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 뿐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시고 친히 이 땅에 인생을 찾아 오셨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의인를 찾아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아 오셨다. 

아버지 찾는 조건 – 아버지(하나님)를 떠난 탕자(죄인) 모두가 아버지를 찾아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돌아오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만 돌아온다. 죽음에 직면한 상황에서 원인이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임을 깨닫고 자신이 아버지를 버리고 떠난 죄인인 것을 철저히 깨닫는다. 나를 찾은 사람과 찾지못한 사람이 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의인으로 착각하고 있으나 세리와 창기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께 나아 온다. 

나를 찾은 자가 하나님을 찾는다 – 성령 체험을 통하여 계시의 영의 역사로 마음 문이 열리면 나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계시를 볼 수 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 부르짖을 때에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고 가르쳐 주었다. 회개하여 죄인임을 통감하고 성령의 체험을 통하여 비로서 자신을 보게 된다. 죄인인 자기 자신을 찾은 사람만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다. 탕자가 죄인임을 깨달았을 때 아버지를 찾아 돌아왔다. 

육안과 영안 – 찾는 것은 눈의 역할이다. 평생 지속되는 찾는 일을 위해 눈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예수님이 육신적 장애를 친히 고쳐 주신 많은 경우가 그 때문이다. 육안의 역할 이상으로 영안의 역할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계시는 육안보다 영안을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육적 시각과 영적 시각은 상반된 시각이기 때문에 영적 시각이 매우 중요하다.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 – 결과적으로 생명과 사망, 축복과 저주는 무엇을 어떻게 보았느냐에 있다. 밭에 감추긴 보화를 아무나 발견한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그 곳을 지나갔지만 발견한 사람은 한 사람이었다. 생명의 길이 좁은 길인 까닭은 영안이 열린 사람만 정확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육안으로 보는 사람은 반대로 멸망의 길, 넓은 길을 택하게 된다. 육안으로 볼 때 멸망으로 가는 길이 넓고 좋게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