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현실이다

Dec 20, 2020

신앙은 현실이다

TV 프로 중에 도시를 떠나서 산속으로 들어가 홀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이들의 사연을 보면 기존의 삶을 떠날 정도로 자연이 좋아서 들어간 경우는 그리 많지 않고 저마다의 특별한 사연이 그들을 산속으로 들어가게 한 것을 알 수 있다. 

기존의 삶의 환경을 떠난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기존의 환경이 주는 안락함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휴가 차 산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남은 삶을 살려고 들어가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도시로 대변되는 모든 관계를 단절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 때문에 아무나선뜻 감행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교회사 가운데도 있었다. 초대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이들이 더욱더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고자 모든 것이 갖춰진 도시생활을 버리고 떠났다. 그리고 기도와 말씀에 정진했다. 그것이 바로 수도원 운동이다.

교회사 가운데 나타난 수도원은 광야와 사막 그리고 깊은 산과 높은 바위 위에 있었다. 그래서 도시로부터 철저하게 단절된 삶을 살았다. 

이렇게 도시와 단절하고 자신만의 경건한 삶을 해결하려고 하였던 이들이 수도사이다. 한때는 이들의 모습이 흠모의 대상이었다. 그 가운데 프란시스코나 베네딕트 그리고 왈도 파와 같은 청빈을 강조하면서 경건에 힘쓰는 수도원들이 존귀한 존재로 여김을 받았다.

그러나 인간의 부패성은 자연으로 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인간의 부패성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수도원의 타락은 가시화 되었고 그 곳에 흘러나온 추악한 이야기들은 더 많은 충격을 가져왔다. 결국 인간은 도시에 있으나 산속에 있으나 같은 존재였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어갔던 산에서 도리어 죄만 지은 것이다.

종교 개혁자 루터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수도원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였다. 산 속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도시를 떠난다고 해결 된다면 더 이상 교회는 도시에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도 절과 같이 산에 지어지고, 목사들은 승려들과 같이 출가하여 해탈을 위하여 힘써야 된다. 그러면 성도들은 출가한 목사들을 희생 염소 삼아서 자신들의 죄를 뒤집어 씌우면 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삶을 말씀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바로 세상이다. [요17:18] 세상에서 데려 가심이 아니라 세상에 보내심이 바로 예수님의 뜻이었다. 그러므로 세상을 떠나는 것은 성경의 뜻이 아니다. 수도원을 만들고 그 곳에 사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세상을 향해 보냄을 받았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루살렘 한 복판에서 말씀을 선포했고,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나와서 도시로 들어갔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 오셔서 도시로 들어 가셨다. 변화산의 초막 셋이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 산 아래서 귀신들려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구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었다.

선지자들은 세상이 힘들다고 산으로 도피하지 않고 오히려 산에서 살다가 세상으로 들어갔다.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은 편하게 사는 길이 아니다. 오히려 고난이 예상되는 길이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선지자들의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세상에서 도피하여 홀로 자신만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만인 제사장이며 동시에 선지자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현실은 어렵고 힘들다. 수많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신자의 사명이다. 선지자적 현실주의는 현실도피주의가 아니라 현실에 살면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발적 불편과 고난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사명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의 의미가 된다. 그 의미를 새삼 상기해야 하는 성탄의 계절을 맞이하고 있다.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성탄을 선물로 받은 신자의 의무이며 삶의 의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