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최후에도 후회하지 않는 사람

Dec 13, 2020

지금도 최후에도 후회하지 않는 사람

우리는 다양한 지식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지식사회에 살고 있다. 인간과 자연은 물론이며, 보이지 않는 것에서 우주에 이르기까지 소화하기 힘든 방대한 정보와 지식을 이용하여 인공 지능까지 개발하는 첨단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나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자기 정체성에 대하여는 의외로 무지한 가운데 살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은 신분적 정체성과 사역적 정체성이 있다. 그리스도인 이야말로 자기 정체성에 확실해야 한다.  

바울 사도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라는 고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였다. 과거 그리스도를 비방한 비방자였으며, 교회를 박해하였던 박해자였고, 성도를 폭행한 폭행자인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인식했다. (딤전 1:13). 자기인식이 가능한 존재와 불가능한 존재가 있다. 비인격적 피조물은 자기 인식이 불가능하지만 인격적 피조물인 인간은 자기 인식이 가능하다. 불행하게도 인격적 피조물 가운데 자기 인식이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구원받지 못한 경우가 그 경우다.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라는 말씀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잊지 않았다.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한 사람만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그 은혜의 크기에 감동한다. 죄인인 자신의 모습을 보며또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고 고백하며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을 고백한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은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보게 되면 “나는 사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전 15:9)”,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나에게...(엡 3:8)”라는 소자 중에서도 가장 작은 ‘소자 의식’을 가지고 살게 된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깨달은 참된 자기 이해 덕분에 바울 사도는 남을 비하시키는 철저한 율법주의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고, 남을 정죄하던 바리새인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죄인인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면 대명천지의 복음 시대에 케케묵은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현대의 바리새인으로서 복음의 원수로 살게 된다. 복음의 원수로 살면서 누구보다 복음적 삶을 산다고 자부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자기 이해는 세월의 흐름에도 변질되지 않았다. 에베소에서 자신을 가리켜 ‘사도 중 작은 자(고전 15:9)’라고 고백한 바울은 그 이후 62년에 로마 감옥에 1차로 투옥되었을 때에는 자신을 ‘성도 중 작은 자(엡 3:8)’로, 

그리고 다메섹 경험으로부터 30여년이 지나 로마 감옥에 2차 투옥이 되었을 때에 ‘죄인 중에 괴수(딤전 1:15)’라고 고백하기에 이른 것이다. 계속해서 자신이 죄인임을 잊지 않고, 낮은 자세에서 떠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이러한 자기 정체성조차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복음에 빚진 자(롬 1:14), 성령에 빚진 자(롬 8:12), 사랑에 빚진 자(롬 13:8)라는 부채의식을 가지고 감옥에서도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라고 말하며 자신을 사용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구원받은 자는 마땅히 갚을 수 없는 빚진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백 데나리온의 빚진 자를 만나 가차없이 감옥으로 끌고 간 인정 사정없는 종은 이미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자였다. 결국 어떻게 됐는가? 

일만 달란트 빚 탕감이 취소되고 그 몸과 처와 자식과 소유 전체를 팔아 갚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빚을 탕감 받는 것이 은혜라고 할 때 그 은혜의 크기는 그야말로 측량이 불가능한 것이다. 측량 못할 은혜를 아는 사람의 자세는 언제나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낮은 자리에 있게 되는 것이다. 갈릴리 호수가 최종적으로 흘러 들어가는 곳이 사해 바다이다. 사해는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곳이다. 해발 -430.5m 이기 때문이다.   

주변의 모든 강물이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이유가 바다 보다도 낮은 깊이 때문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심령에 임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은혜 받으면 받을수록 축복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낮아지고 자신의 가치 없음, 무익함, 무식함, 어리석음, 연약함을 스스로가 인식하는 겸비한 신분 의식과 이에 따라 더욱 충성하고 어떠한 십자가도 감당하는 투철한 사명 의식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사명은 이러한 은혜에 대한 지극히 당연한 축복적 의무이다. 받은 은혜의 무한함을 아는 자가 생명을 바칠 헌신과 충성을 결단하고 과감하게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간다. 죽음도 그를 막지 못한다. “나의 달려 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인생을 마감할 때에 후회하지 않는 삶이 가장 성공한 삶이라면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