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길은 왜 좁고 협착한가?

Sep 13, 2020
구원의 길은 왜 좁고 협착한가?
 
상식적으로 볼 때, 이런 복음적 구원 잔치에는 사람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모여 들어야 한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다. “다 일치하게 사양했다(눅 14:18)”. 물론 이들은 이방인에 앞서 먼저 ‘구원에의 초대를 받은 유대인들’을 상징하지만, 복음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일반적 반응이기도 하다. 구원이 ‘값없이’ 주어진다고 무조건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댓가’를 요구 받는다고 배척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구원에의 초대를 ‘수납’ 혹은 ‘거부’하는 것이 순전히 인간 성향, 의지의 문제만이 아닌 다른 근원적 요소, 곧 하나님의 택정과 관련돼 있음을 보여준다. 곧, 하나님이 눈을 열어 준 자들은 복음에 환호하게 되고, 눈을 감기게 한 자들에게는 그것이 미련하게 보인다(고전 1:18).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는 말씀 역시 신중한 해석을 요한다. 흔히 이 구절을 읽을 때 ‘얼마나 구원이 어려우면 그렇게 들어가길 원하는데도 뭇 들어갈까’라는 선입견을 갖기 쉬운데, 이는 ‘인간이 아무리 구원을 얻으려고 발버둥을 쳐도 못 얻는다’는 뜻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이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고 하신 말씀이 부정돼야 한다. 하나님은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를 결코 내치지 않으신다. 이는 잘못된 방법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자들에 대한 경계이다. ‘구원의 문’은 오직‘예수 믿음’이며, 이‘예수 믿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다른 데로 넘어오는 자들을 “절도며 강도(요 10:1)”라고 분명히 못 박았다.
 
대표적인 이들이 ‘믿음의 의(義)’가 아닌, ‘자기 의’를 세우려다가 하나님의 의를 부정하고, 그 결과 의에 이르지 못했던 이스라엘(롬 10:3)이다. ‘구원의 문’을 ‘좁은 문(마 7:13)’이라 했음도, ‘아이비리그 대학’에 들어가려면 보통 실력으로는 안 되듯, 구원도 출중한 실력을 갖춰야만 얻는다는 뜻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세상의 무능한 자, 미련한 자, 약한 자, 천한 자, 멸시받는 자를 구원하여 세상의 지혜 있는 자, 능력자들을 부끄럽게 한다(고전 1:26-29)”는 성경의 가르침이 부정돼야 한다. 미련 한자, 약한 자, 천한 자, 멸시 받는 자들이 구원받는 것은 그들이야말로 은혜가 아니면 안될 죄인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 이름’ 외에는 구원 얻을 길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좁은 문’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또 ‘구원의 길이 협착하다(마 7:14)’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구원을 받으려면 ‘온갖 율법적 의행(義行)’과 ‘엄청난 수고’가 따라야만 한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빌 2:10)는 뜻이다. 무릎 꿇는 것을 왜 그토록 어렵다고 하는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이다. 무릎 꿇는 행위는 주권 포기를 말한다. 빌2:6-7에서 ‘종의 형체’를 가졌다고 말하는 이유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부자 청년 사건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결론적인 말씀이 있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차라리 쉽다”고 하셨다. 낙타가 들어가는 바늘 구멍은 성문이 닫힌 후에 들어가는 비상문을 말한다. 그 문은 낙타 등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은 내 인생의 주인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주권이 바뀌는 것이다.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 이외에는 다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를 만나면 모든 것이 배설물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다 버리게 된다. 
 
율법이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갈 3:12)”고 하니, 죽지 않기 위해 의무적으로 마지못해 하는 것이야말로 고행 그 자체인 것이 ‘율법적 의’의 종 노릇하던 삶에서 속전을 지불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주인으로 영접한 결과는 죄와 마귀의 종 된 데서 해방되고, ‘자기 신뢰’와 ‘율법적 의’을 배설물로 여기고(빌 3:6-8) 예수 앞에 철저히‘항복하여 그의 종’이 되는 것이다. ‘구원의 길이 협착 하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이며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는 주님의 말씀이 그 해결책인 것이다. 
 
좁고 협착한 그 길은 인간의 힘으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길이다. 사람은 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가능한 것이 구원이요 그래서 구원은 철저히 은혜인 것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길이 세상적 시각, 율법적 시각으로는 분명히 좁은 길, 협착한 길이 틀림없지만 믿음의 눈, 영적인 눈으로 보면 그 길은 결코 좁은 길 협착한 길이 아니라 넓은 길, 평탄한 길, 쉬운 길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복음이요 기쁜 소식 임에 불구하고 괴롭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방법을 거부하고 자기의 방법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영의 방법으로 하지 않고 육의 방법으로 하려고 하며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사람의 방법을 고집하기 때문에 쉬운 길을 버리고 어려운 길을 가고 넓은 길을 버리고 좁은 길로 가고 있다. 세상 사람이 가는 길은 끝까지 고통의 길, 불행의 길이다. 하나님의 방법의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의 길 축복의 길 형통의 길이다. 우리의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 육적 시각에서 영적 시각으로 바뀌어야 한다.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여시고 귀를 여신 것처럼 죄인의 영적 눈과 귀를 열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