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길은 왜 좁고 협착한가?

Sep 06, 2020

구원의 길은 왜 좁고 협착한가?

구원의 길이 좁고 협착 하다는 것은 구원받는 수가 적다는 의미이다. 왜 구원 얻는 자가 적은가? 구원은 원하는 자에게 값없이 은혜로 주어진다. 그래서 구원을 복음, 기쁜 소식(good news),이라고 한다. 다음은 ‘구원의 은혜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구절들이다.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 되었나이다(눅 14:17)”. 특히 ‘구원에의 초대’를 ‘완비된 잔치로의 초대’로 비유 했음은, 그것이 값없이 베풀어지는 잔치이기 때문이다. 만일 잔치 참여자에게 입장료(admission ticket)가 부과된다면, 그것은 부담스러운 연회이지 결코 기쁜 잔치일 수 없다.

구원은 값없이 은혜로 주어지는데, 왜 구원받은 자가 적다 하는가? 구원이 값없이 주어짐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만일 구원이 은혜로 주어진다면 구원받는 수가 많아야 하는데, 성경에 의하면 ‘구원 얻는 사람의 수가 적다(눅 13:23)’고 한 것을 보면, 구원은 공짜가 아님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가 많고 적음’은 ‘구원이 공짜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 아니다. 만일 ‘구원의 댓가’가 요구된다면, 구원 얻을 사람이 아예 ‘없다’고 해야 옳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 외, 우리에게 ‘구원의 댓가’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의 율법적 행위를 ‘구원의 댓가’로 산정하고,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라며 우문(愚問)한 ‘부자 관원’에게 예수님이 경매하듯 계속 구원의 ‘액면가’를 높여 제시한 것은(마 19:17-21), 인간의 율법적 행위는 ‘구원의 댓가’가 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유대 율법주의들처럼, 설사 어거지로 율법적 행위를 ‘구원의 댓가’로 산정하더라도, 그 값은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 혹은 ‘적선보시 극락왕생(積善普施 極樂往生)’이라는 여타 종교의 구원 산정(算定)처럼 두루  뭉술해 질 수밖에 없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어질 때만 은혜의 본질이 확실해진다. 예수님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고 하신 것은, “사람이 구원의 댓가를 지불하려 할 때 ‘구원의 길’은 모호해지고, 구원이 은혜에 의존될 때만 ‘구원의 길’이 명료하고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것(마 7:14)”은 지불해야 될 ‘구원의 댓가’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역설적으로 ‘공짜’이기 때문이다. 성경 시대나 지금이나 “싼 게 비지떡, 비쌀수록 좋다”는 세태적(世態的) 경제관념이 구원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공짜에 무슨 구원이 있겠는가?’라는 편견이 사람들로 하여금 ‘공짜 구원’을 못 믿게 하고, 구원의 문을 ‘좁게’ 만들었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싼 것’에 견디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고문이며 고통일 수 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자기 의행(義行)’을 배제시키고 ‘믿음으로만 구원 받으라’고 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수치였다. ‘이신 칭의’를 가르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박해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요 1:46)’는 당대의 인식도, ‘싼 것에는 구원이 없다’는 ‘경제 논리’가 작동한 결과이다. 

이런 ‘경제적 구원관’ 아래서는 비싼 ‘구원가’를 요구받는 율법주의 종교가 정당성과 합법성을 갖게 되고 인정받게 되어 자타가 공인하는 정상 종교로 등극하게 된다. 대중에게 가장 모범적인 종교로 인정받아 많은 인기를 누리게 된다. 그리하여 세계 4대 종교니, 3대 종교니 하는 세상 여론의 순위를 다투게 되고 종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종교 선택에 많은 확률을 가진 종교가 된다. 이슬람, 불교, 힌두교는 다 ‘엄격한 계율’로 유명하다. 이들 종교가 ‘세계 4대 종교’ 반열에 든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비싼 대가를 요구할수록 좋은 종교이다’라는 경제적 구원관 때문이다. 경제적 구원관이 일반 대중의 종교관에 반영되어 ‘쉬운 종교가 선호 받을 것’이라는 일반의 추정을 묵살시킨다. 그리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마 7:13)”는 말씀은 ‘구원의 길이 너무 쉬워 보여 많은 사람이 그리로 들어가다가 멸망에 빠뜨려 진다’는 뜻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구원받는다’는 거짓 가르침에 현혹되어 멸망 당한다”는 뜻이다. 

흔히 비싼 대가를 지불하는 ‘고행적(苦行的) 종교’를 말하면 사람들이 싫어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종교란 당연히 고행스러워야 진국이고, 비싼 대가를 지불하는 종교일수록 고급지다’는 ‘경제적 구원 관념’에 익숙하다. 구원은 그것의 쉽고 어려움에 달려 있지 않다. 모두에 말했듯, ‘구원’은 모든 것이 준비된 잔치와 같아서 아무 대가 없이 와서 그것을 취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적 구원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