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 2 (애통하는 자)

Mar 05, 2017
주일대예배
안인권목사
구절: 
마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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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애통하는 자)(마5:4)

애통의 유익 -- 정상적인 것이 얼마나 기적이며 은혜이며 축복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모르고 사는 삶은 감사도 행복도 기쁨도 모르고 살게 된다. 알고 사는 삶은 그 자체가 행복이요 기쁨의 연속이 된다. 감사의 여부가 행복의 여부를 결정한다. 정상적인 것의 기적과 은혜를 왜 모를까? 비정상적인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건강이 기적이라는 사실은 건강을 상실한 비정상적 상태를 경험한 사람만이 알게 된다.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기적인지는 식사를 할 수 없는 비정상적 상태를 당했을 때에 깨닫게 된다. 정상적으로 호흡을 하는것, 정상적으로 걸어 다니는 것등등 모든 것이 기적이다. 애통은 정상적인 상태 때문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상태로 인하여 발생되어진다. 이것이 엄청난 축복의 원인이 된다.

구원받기전의 애통 --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애통은 피해자로서의 애통이다. 애통보다는 차라리 원통이 맞을 것이다. 잘못없이 무고하 게 당하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속아서 당하고 무지해서 당하고 실수해서 당하고 누명을 쓰고 당했기 때문에 너무 아프고 슬픈 것이다. 너무 억울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우는 것이다. 또 하나는 힘이 없어서 알면서 당하는 억울함이다. 빈부의 차별, 인종차별, 식민지 백성 이기 때문에 당하는 착취, 강대국의 일방적 지배와 수탈, 가난한 이유로 하인과 머슴살이하는 수모등으로 고통스런 슬픔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약육강식의 냉엄한 현실에서 힘이 없어서 부당하게 당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이 사람들은 남때문에 불행하게 산다는 고정관념에 잡혀있기 쉽다.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은  당사자를 결코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 합리화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은 후의 애통 -- 구원받은 후의 애통은 가해자로서의 애통이다. 구원받기전의 애통이 남때문에 내 마음이 아픈 것이라면 구원 받은후이 애통은 나 때문에 남의 마음이 아프게 된것을 애통하는 것이다. 구원이 확실하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 순간 불평하고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있다. 그것을 깨달을 때마다 회개하면서 마음의 통증을 느끼는 것이다. 구원받기 전에는 피해자 입장에 있다고만 생각했으나 알고 보면 그에 못지 않게 가해자 입장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때문에 남의 마음이 아팠을 것을 생각하면 내 자신이 상처를 받은 것 이상으로 마음이 아픈것이이다.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주께 한 것이요 하지 않은 것이 주께 하지 않은 것이다.

구원의 과정의 애통(애통의 시작과 구원) -- 가장 중요한 애통의 의미는 구원과 관계가 있다. 애통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사도행전에 베드로의 설교 장면과 스데반 설교 장면이 나온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과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다르다. 두가지 경우의 공통점은 마음에 찔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차이가 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찔린 사람들은 회개하는데 반해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찔린 사람들은 스데반을 해친다. 같은 말씀을 통해 찔림을 받고 회개하느냐 반격하느냐의 차이가 구원의 결정적 동기가 된다. 애통하는 회개의 여부가 인생의 방향을 좌우하게 된다. 말씀을 듣고 애통하게 되는 자체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에 찔려 회개함으로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사람은 복받은 사람이다.

구원후 애통 못하는자(애통의 유지와 구원) --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는 사람 가운데 애통하지 못하는 사람이 두 부류가 있다. 성령을 못 받은 사람이 있고 성령을 받았으나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영적으로 마비된 사람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죄를 못느낀다는 점이다. 죄를 느끼지 못하면 죄를 반복하는 불행이 지속되게 된다. 죄의 지속은 성령을 근심케 하고 마귀를 즐겁게 해주는 삶이다. 마귀에게 쓰임받는 사람은 교회의 방해가 되고 천국의 문을 막는 역할을 하게 된다. 영혼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이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주님의 몸된 교회에 상처를 주면서 전혀 가책을 못느끼는 사람이다.

애통의 필연성(현재 애통과 미래 애통) -- 애통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애통은 현재하든지 미래에 하든지 필연적으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아니면 마지막에 반드시 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요16:20에서 '너희는 애통하겠으나 기뻐하게 되며 세상은 기뻐하겠으나 곡하게 되리라' 눅6:25에서 "화있을진저 배부른자여 주리게 될 것이며 웃는자여 애통하며 울게 되리라"고 하셨다. 심판의 날이 오기 때문이다. 지금 애통하는자가 무너지지 않는 평강과 위로의 주인공이 되고 지금 고통을 감당하는 자가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기쁨의 주인공이 된다. 지금 희생을 감당하는자가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높이시리라"(약4:9-10) 오늘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는 자만이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수 있고 영원한 승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