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을 뚫고 믿으라

Jan 31, 2015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2:3-5)

어렸을 때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유치한 꿈을 말하기도 하고 황당한 꿈을 말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구체적으로는 모른다는 것이다. 사는 동안 사건과 사람, 기회들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끊임없는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누리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 끊임없는 성장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마음자세를 갖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받은 축복 위에 더 많은 축복을 임하도록 자기 자신을 부단히 계발한다. 축복을 위한 자신의 인생의 자세 바꾸기, 즉 위치설정을 다시 하는 것이다. 누구나 인생의 목표달성을 위해 눈에 띄는 전진이 있기까지는 수많은 실패와 시도를 거듭하게 된다. 실패를 통해 경험을 얻게 된다. 주의할 것은 과거의 실수들이 인생의 발목을 붙잡고 미래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마음속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그리하면 인생의 무한성공을 위한 열쇠들을 발견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실패와 성공의 요인이 운명이나 환경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성공이 복권 당첨처럼 특정한 장소 특별한 사람에게만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라 믿고 싶어한다. 성공이 특별함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보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져 있다. 성공은 더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결과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은사와 재능, 그리고 기회를 잘 관리하는 청지기로 부르셨다. 진정한 의미의 성공과 형통은 청지기 직분의 결과물이다. <담대한 믿음>의 저자 J. D 제이크스가 아프리카 케냐 단기선교에서 경험한 일이다. 메마른 작은 마을의 '자히'라는가난한 여인의 가정을 방문했다. 60대 중반의 이 여인은 나무가지와 소똥으로 혼자 지은 집으로 안내하면서 궁궐로 초대하듯 당당했다. 가난을 슬퍼하거나 수치스럽게 생각지 않았다.

잊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에 대하여 끊임없이 자랑하던 그 여인의 심연 속의 평안이었다. 거친 황야의 흙먼지 속에서 그을린 검은 얼굴에 환한 웃음을 잃지 않는 내면의 평안은 부러울 정도였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형통에 대한 간증을 듣고 있노라면 세상의 어떤 회계사도 계산하지 못할 만큼의 숨겨둔 자산이 있는것 같았다. 염소 한 마리가 큰 재산이 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자히'를 방문한 이후, 제이크스는 성공과 형통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릴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에게 형통이란,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다르다. 그들의 형통은 우리 문화에서 이해되는 것처럼 자기성취와 성공의 장식품 같은 개념이 아니었다. 형통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며, 그 과정은 시작점부터 측정되어야 한다. 우리 문화에서는 종종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똑같은 출발선상에서 경쟁을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자히의 집을 떠날 때 비가 내렸다. 그 마을 사람들은 형통과 축북의 징조라고 손뼉치며 기뻐했다. 그러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반대로 여행을 불편하게 하고, 생활을 방해하는 성가신 것으로 생각한다. 형통의 의미가 뜬구름 잡는 식의 일시적 행복과 긍정적 운명을 의미하는 단어로 전락한 시대에 살고 있다. 형통이 엄청난 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형통은 부요를 나눌수 있어야 한다. 나누지 못하는 부는 형통이 아니다. 성경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방법으로 곡해해서는 안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가난이 지고한 영성의 기준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르치기도 한다. 부자로 풍요를 누리는 것보다는 자녀 양육조차 겨우 할 정도의 가난한 삶이 더욱 경건하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어떤 교회에서는 이러한 것이 영성의 기준이었고 아직도 그렇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다.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판잣촌도 있고 외제 승용차가 즐비한 부자 동네도 있다. 선거때마다 정치인들은 두얼굴을 가지고 사람을 대한다. 가난한 동네에 가서는 부자를 부도덕한 절도범 취급하고, 부자 동네에 가서는 기업 활동을 통한 애국자로 칭송한다. 양복입은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작업복 입은 사람을 환영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허름하게 입은 사람은 큰 관심두지 않고 화려하게 입은 사람은 반가워하는 교회도 있다. 부자를 경멸하고 가난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고, 가난을 경멸하고 부자를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 어느 편이 옳은가가 아니라 두 세계를 아우를 수 있는 균형 잡힌 생각이 건강한 마음의 상태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당신의 백성에게 복 주시는 분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은 열심과 책임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마술을 믿으라고 가르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꿈이 저절로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지붕이라는 한계를 뚫고 행동해야 한다.